본문 바로가기

하나님의 약속 큐티/설교

[기도하는 방법]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기도는 크리스천이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특히 새벽 기도와 밤 기도는 더욱 필요합니다. 그런데 매일 기도해도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걸 느낄 수 없고 허공에 대고 말하며 심령의 평안과 기쁨이 없어 곤혹스럽진 않나요?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않으실까요? 우리의 기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는 방법]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종교 의식의 기도를 가장 혐오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반드시 진심으로 기도해야 열납될 수 있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늘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멋대로 맹세해서 하나님을 속이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께 충심을 다하고 싶다는 둥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너의 소망은 네가 달하지도 못하고, 또한 그럴 만한 의지도 없고 분량도 안 된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조롱이다. 조롱이라는 단어에는 비웃고 우롱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만일 그런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가볍게 말하면 기만하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해 네가 늘 그렇게 한다면 너라는 사람의 성품은 너무나 비천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정죄한다면 그것을 모독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만족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거나 패괴 성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이러한 품행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이방인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만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인 뒤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자신이 한 일의 심각성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함께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함께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의 빛 비춤이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너희는 이런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느냐? 그것도 자주 하지 않느냐? 사람이 이 세상에 오래 살다 보면 거기에 물들어 불량기가 가득해진다. 사탄의 독소와 생존 방식이 사람에게 깊이 침투돼 입만 열면 위선적인 말과 거짓말이고 양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늘 속셈을 갖고 있는데, 올바른 마음가짐은 거의 없다. 이는 너무나 심각하다. 사람이 그런 사탄의 철학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온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겠느냐?』

 

― <자신을 알아야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중에서


  『이제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람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오지만, 여전히 기도는 기도대로 하고 일은 일대로 한다. 사람은 기도할 때 일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의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를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강요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 어떤 것을 사모하든,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하든,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 말하는 방식에도 이성이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비이성적으로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해 주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엇 무엇을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너 자신이 사전에 다 정해 놓은 것이다. 성령은 그런 기도에 대해 ‘네가 이미 스스로 정해 놓고 행동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할 것이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하기만을 원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시고, 저를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저에게 적합한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합당한 사람을 예비해 주셔서 저로 사역을 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한다면, 이렇게 기도한 후에도 하나님의 뜻은 모른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께 너의 뜻대로 일을 해 달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 <기도의 의의와 실행> 중에서

 

[기도하는 방법]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너희는 이성 없이 기도할 때가 너무 많다. 모두가 “하나님! 제게 이 본분을 주셨으니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적절하도록, 당신의 사역을 방해하거나 하나님 집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저를 지켜 주십시오….”라는 어투로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너무나도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네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이렇게 이성이 없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겠느냐? 네가 그리스도 앞에 와서 내게 말할 때 이성이 없는데, 내가 들어줄 수 있겠느냐? 너를 단번에 차 버리겠다! 네가 영 앞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앞에 온 것은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때, 어떻게 말해야 이성이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경건하도록 마음을 다잡고 순종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다시 기도하면 좋아질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느낌이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은 기도하려고 무릎 꿇고 눈을 감으면 내용은 없이, “오, 하나님, 오, 하나님이시여!”라고만 하는데, 이 두 마디 말밖에 없다. 반나절을 외쳐도 할 말이 없다. 왜 그런 것이냐? 너의 정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런 경우가 없었느냐? 너희와 같은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너희는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고 어느 정도로 저지르게 될지도 알고, 자신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형이 비정상이다. 어떤 때에는 되돌려져도 어떻게 되돌려진 것인지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기도할 때 할 말이 없으면 지식 수준이 낮아서 그런 거라고 여긴다. 기도하는 것도 지식이 필요하단 말이냐? 그것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니 실제적으로 정상 사람의 이성대로 말하면 된다. 예수의 기도를 보아라(예수의 기도를 보라고 해서 반드시 예수와 같은 각도와 위치에 서서 기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할만하시거든…”이라고 기도했다. 다시 말해, ‘가능하다면’이라며 상의를 하고자 했지, ‘바라옵건대’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순종의 마음으로, 그리고 순종적인 내적 상태로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으며, 두 번째 기도도 이러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도에서 그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기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는 완전히 순종할 수 있었고, 거기에 자신의 선택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왜 “만일 할만하시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했겠느냐?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과 관련된 일이었으며,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그렇게 기도했다. 그 고통을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큰 순종이다. 그가 그렇게 기도한 것은 정상적이다. 그는 기도하면서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지나가게 해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뿐이다. 처음 기도할 때 그는 알지 못했기에 “만일 할만하시거든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다. 그는 순종적인 내적 상태로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두 번째 기도도 그러했다. 그는 총 세 번 기도했는데(물론 이 세 번의 기도가 3일 동안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더는 뭔가를 구하지 않았다. 앞의 두 번의 기도에서 그는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 역시 순종적인 상태 안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사람은 늘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십시오. 어떻게 어떻게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제게 조건을 예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적합한 환경을 예비해 주지 않고 그 고난을 겪게 할 수도 있는데, 늘 “하나님, 저를 위해 예비해 주시고, 제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는 얼마나 비이성적이겠느냐! 너는 기도할 때 이성적이어야 한다. 순종을 전제로 기도하되, 규정해선 안 된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규정하지 마라.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하는 기도는 너무나도 비이성적인 기도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전혀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기도해도 무미건조한 것이다.』

 

― <기도의 의의와 실행> 중에서

 

출처:하나님의 약속